양치

나도 나도 !
그의 양치하는 소리가 들릴 때면 괜히 덩달아 양치가 하고 싶었다. 내가 욕실로 부리나케 달려들어가 칫솔을 들고 깐죽대면 그는 하던 양치질을 멈추고선 내 칫솔위에 치약을 곱게 짜주곤 했다. 너는 매운걸 못참으니깐 조금만.
거품이 보글보글 일어난다. 십센티는 더 높이있는 그의 입안을 들여다보며 나는 열심히 솔질을 했다. 같은 치약으로 같은 행동을 하는데, 이상하게 그의 거품과 내 거품은 양이 다르다.
‘좀 더 꼼꼼하게 안닦을래? 이렇게, 이렇게’
나는 그의 칫솔질을 가열차게 따라해본다. 맵다.
연애라는건 스물 여섯밖에 안된 청년이 스물 넷이나 된 아가씨에게 칫솔질을 새로이 가르쳐주기도 해야 하는, 뭐 그런것이다. 서로가 어설프기 짝이 없어 코끝이 찡한것.
같이 걷자

난 지독한 뚜벅이라서 두시간이고 세시간이고 그냥 걸을 때가 많아. 우울할때도 즐거울때도 그냥 걷는거야. 드라이브 할래요? 보단 같이 걸을까요? 라고 말해주는 남자가 더 좋은것도 이때문이겠지.
잡소음이 끓는 길거리를 같이 걸으면 비오는 날 우산아래 생기는 나만의 공간처럼 우리만 누리는 세상이 생기는것 같단 말이야. 오 진짜 오글오글한 표현인것 같네. 하지만 기왕에 말 꺼낸거 마무리는 해야지. 내게 이상형이 있다면 같이 커피한 잔 들고 걸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.
저기요, 커피는 내가 살테니 그냥 이야기나 들려줘요. 아니 맥주도 좋아요. 자꾸 어깨가 부딪혀도 놀라지는 말길. 나 원래 걸음걸이가 좀 엉망이라서.
요즘처럼 걷기좋은 날에 강가를 걸으면 공기에서 물냄새가 나. 그러니깐 같이 걷자. 참, 센스있게 운동화 신고 나오는거 잊지말고.
썸

처음으로 친구들과 다함께 술을 마시고서 대학가를 쏘다녔던 그 때, 좋아하던 아이에게 관심을 받고싶어 나는 무리에서 빠져나와 느릿느릿 혼자 길을 걸었다. 나의 부재를 알아채주길 바라면서 얄궂은 수를 썼던 셈이다. 하지만 한 번도 뒤돌아 보지 않고 친구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길을 걷던 그 아이. 나는 그 뒤통수가 너무 야속해 아팠다.
3차로 도착한 동기의 자취방 앞, 모두가 정신없을 무렵 갑자기 그 아이는 내 귀에다 소근소근 말을 건냈다. 노래 한 곡 듣고 들어가자고.
나와 그 아이는 생전 처음보는 집 대문앞에 앉아 함께 노래를 들었고 나에게도 이런 기적같은 일이 생겼다는 사실에 술 기운도 더해져 심장이 녹아내릴것 같았더랬다.
‘썸‘ 이란 단어도 없던 시절 이야기.
서울, 서울

한강은 참 예뻤다.
그곳에 앉아 내가 사는곳이 강북이니 강 건너편 저기가 강남이구나 하며 반짝 반짝 밝은빛에 나는 자꾸 주눅이 들었다.
나는 늘 궁했다. 궁한 마음이 자꾸만 내 손을 잡고 벼랑끝으로 놀러갔고 나는 어쩔줄 몰라 굵다란 청담대교 아래서 울기만 했다. 열차가 지나갈 때면 그 드센 쇳소리에 숨어 목청을 가다듬었다. 스물 다섯. 일찌감치 천재성에 대한 기대도 저버렸고 예술가적 기질은 역부족이었다. 일주일 전에 헤어진 남자친구 생각도 많이났다.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주던 사람이 내 생활에서 지워지자 집 떠난지 6년만에 나는 진짜 혼자가 되었고 그제사 모든것이 두려워졌다.
그 무렵엔 몸 여기저기가 자꾸 아팠다. 내게 남은건 과제위에 엎어져 잠들던 여기저기 불편한 시간들 뿐인데 건강을 잃었다. 술에 절기도 하고, 미친 척 이 나라를 떠났다 돌아온 친구들의 맑은 눈이 부러웠다. 노는법을 잊었고 형광등 아래서 비릿하게 힘을 잃어가던 나의 눈 끝에는 매일 눈물만 그렁그렁 매달렸다. 하필 집 계약이 만료되던 해인지라 나는 저린 다리를 끌며 부모님이 손톱이 부러지게 긁어모은 돈을 안고 부동산을 전전했다. 서울엔 내 몸 하나 뉘일 마땅한 구석이 없었다. 부동산 중개인들, 그들은 종종 내게 볕이나 바람, 때로는 안전을 포기하라 말했다. 나의 사정이란게 늘 그런식이었지 싶다. 자꾸 포기해야만 하는 삶. 내게 스물 다섯은 그렇고 그런 시기였다.
그래서 나는 매일 한강을 갔다. 그 무렵의 한강은 여름 어귀에 접어들고 있어서, 내 또래의 아이들은 매일 밤 그곳으로 모여들었다. 강물위로 웃음이 쏟아지던 참 좋은 시절이었다. 친구도 없었고 사랑도 없었고 심지어 돈도 꿈도 목표도 없었고던 나의 가장 까만 시절에 한강은 눈부시게 예뻤다.
그 해는 세상이 가장 아름다웠다.